돈·사회 · 2020
나무에 적은 옛 『논어』는 일본으로 배움이 전해진 방식을 보여 줄까요?
이 연구는 한국·중국·일본의 출토 자료를 비교해, 고대 일본의 휴대용 학습에는 백제 쌍북리 목간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해요. 큰 목간을 공공 교육에 쓰는 방식은 봉황동·계양산성 자료와 연결해 설명해요. 나무 문서의 형태와 적는 방식을 비교한 역사적 해석이에요.
상세 설명
이 연구는 쌍북리 『논어』 이 동아시아의 전적 교류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본 비교 역사 연구입니다. 쌍북리 목간의 출토 상황과 선행연구, 한국의 『논어』 목간 출토 사례를 정리한 뒤, 출토된 『논어』 간독의 특징을 중국 왕조 및 고대 일본의 사례와 비교했습니다.
쌍북리 『논어』 목간은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봉황동·계양산성 『논어』 목간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. 공통점은 여러 면을 가진 ‘고(觚)’ 형태라는 점뿐이었습니다. 쌍북리 목간은 다른 두 사례와 달리 당시 지방이 아니라 왕경에서 출토되었습니다. 남아 있는 것이 완형에 가까우며 좁고 길쭉한 형태가 아니고, 『학이편(學而篇)』의 맨 앞부분을 적었다는 차이도 있었습니다.
비교 대상을 북한·중국·일본 등의 『논어』 간독으로 넓히자, 쌍북리 목간은 규격 면에서 한대(漢代)의 서적간과 공통점을 보였습니다. 봉황동·계양산성 목간은 하나의 고에 한 장을 적는 ‘1장 1고(1章1觚)’ 방식에서 하서(河西) 지역 출토 서적 목간과 공통점이 있었습니다. 즉 두 유형 모두 중국에서 출토된 『논어』 간독보다는 다른 서적 간독과 공통점을 보였습니다.
고대 일본에서 『학이편』을 적거나 목간을 휴대용 학습에 사용한 데에는 백제, 즉 쌍북리 『논어』 목간의 영향이 있었다고 연구는 해석했습니다. 반면 대형 목간에 ‘1장 1고’ 방식을 적용해 공공 교육에 사용한 데에는 봉황동·계양산성 『논어』 목간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.
쌍북리 목간의 저본은 『논어집해』와 『논어의소』 중 하나로 생각되지만, 현재로서는 어느 쪽인지 추정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밝혔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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